
누가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금요일의 십자가를 향한 주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따라가며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1절에서 8절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도록 제가 읽겠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참 슬픈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최후의 선언을 하십니다. 다 끝났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 선언을 하시게 만든 문제는 바로 ‘권위’입니다. 우리는 ‘권위’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권위가 있다 혹은 권위 아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압니다. ‘권위’라는 말에는 의미심장한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허가, 권력, 특권, 통치, 통제, 지배의 의미가 담겨 있죠.
이 세상은 권위로 가득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권위가 있죠. 학교에도 권위 체계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권위를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익숙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권위 아래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자신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따라서 권위가 있다, 또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어떤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권위보다 훨씬 더 큰 권위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이 권위의 실상이 전혀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모든 권세, 모든 권위입니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주권자이심을 뜻합니다. 모든 권세가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권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이 위대한 산상수훈을 마치셨을 때, 이 산상수훈은 거짓된 유대교를 뒤흔드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권유로 끝나죠, 무리들이 놀라며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의 권위로 말하는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동일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끌어와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마태복음 9장 6절부터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런데 그런 권능, 그런 권위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바에 따르면 오직 한 분에게만 속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죠.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이 모든 지옥의 세력, 즉 귀신의 세력을 압도하는 권위를 가지셨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예수님은 구원하는 권위, 곧 영적인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권위를 주장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모든 사람을 심판할 권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권위를 주장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위대한 표현대로, 예수님은 죽음과 생명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7장 2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만민을,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제외한 그 어떤 권위 아래에도 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계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완벽하게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에게는 권위가 있으십니다. 이 권위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그런 종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이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뜻하시는 때에, 자신이 뜻하시는 사람이나 수단을 사용해서 행하실 수 있는 절대적으로 독자적인 권위가 있으십니다.
이와 같은 권위의 본질은 ‘권위’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단어 두 개를 살펴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통 ‘능력’으로 번역되는 ‘두나미스’입니다. 영어 단어 ‘다이너마이트’가 이 두나미스에서 유래되었죠. 두나미스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뜻합니다. 또 다른 한 단어는 ‘엑수시아’입니다. 엑수시아는 보통 ‘권위’로 번역되는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 세 번 등장한 ‘권위’가 바로 이 엑수시아입니다. 이 엑수시아는 권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모든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곧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다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원하시는 사람이나 원하시는 것들로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권위를 가졌다는 말의 뜻이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은 두나미스와 엑수시아를 모두 다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성육신하셨고, 인간의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스스로 자신을 종으로 낮추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행하기 원하시는 것들을 정확히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 능력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예수님의 권리 역시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뜻하신 바를 다 그대로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으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하나됨의 조화를 이루시는 것들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려고 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세상의 절차를 따른 그 어떤 허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권위를 구했던 적이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내용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가 보물처럼 여겼던 모든 것을 공격하시고 산산조각 내시면서도, 예수님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권위도 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에 유대인들은 모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구제, 금식, 기도, 희생 제사, 자기 의,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오류를 드러내고 공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체계 전반에 걸친 핵심 내용과 중요한 부분들을 공격하실 때 랍비들 중 어느 누구도 인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어떤 허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랍비 협의체에 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시 모든 교사들과 랍비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임명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의 신학을 검토하거나 승인을 해준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채찍을 만들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 내셨을 때에도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로 구성된 성전 관리 위원회라거나 성전 내 매매권 사업을 하던 그 누구에게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사두개인, 헤롯당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두 번 다 그 어떤 승인이나 허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19장 45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수님은 어떤 허가도 받지 않으시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은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권한도 받지 않고 예수님이 독자적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결코 인간의 권위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정화는 어떤 의미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해진 또 하나의 커다란 공격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공격하고 신뢰성을 공격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지도자들의 지독한 위선을 폭로하셨고, 이제는 이들의 영역에 물리적으로 개입하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겁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어떤 스승이나 랍비와의 관계도 없이, 산헤드린의 적법한 임명 절차도 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도자들에게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허가도 받지 않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행하셨습니다. 예언을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셨습니다. 참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점들은 지도자들도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어느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권위로 행하셨습니다.
결국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종교 체계 전체를 마치 그런 것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도, 대제사장도, 공의회도, 대중의 의견도,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에게도 랍비에게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율법학자, 서기관, 율법사에게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제사 제도에도, 성전 사업에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것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아주 맹렬하게 공격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적대감이 그야말로 폭발 직전의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는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높은 신분으로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긴 예복을 입고 장식용 술을 달고 권력자 행세를 하면서, 거룩한 체 하면서 살았습니다. 금식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성전에 도착하면 나팔을 불게 해서 구제할 때 모두가 보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면서 살았습니다. 지위가 더 높아져서 '주인님', '선생님', '아버지' 이렇게 남들이 불러주기를 꿈꾸면서 살았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만이 전부였던 그들을 예수님은 말 그대로 완전히 무시하셨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와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완전히 소외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누군가 자신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면 참 기가 막히고 참기 어려운 법이죠. 여기에 다른 모든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결국 유대 지도자들은 말 그대로 증오의 불꽃으로 영혼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마침내 금요일에 십자가 사건이라는 아주 거센 불길로 폭발했던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해의 대부분을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신 후에, 이어서 갈릴리에서의 짧은 사역을 막 마친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내시려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요단 건너 동쪽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후 30년, 유대인의 첫 달에 해당하는 니산월 토요일에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셨습니다. 금요일의 죽음을 예비하시기 위해서였는데, 이 날은 유월절 어린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했던 것처럼, 예수님이야말로 그 해 그 날에 죽임 당할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신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을 쏟으셨던 가족에게로 가셨습니다. 바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가족이었죠. 이들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베다니라고 불리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토요일 밤을 그곳에서 지내셨습니다. 일요일에는 예수님이 그곳에 와 계시다는 소문이 나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려고 베다니로 찾아왔습니다. 몇 주 전에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죠. 일요일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머무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베다니로 왔습니다.
월요일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 즉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오실 때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는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셨는데,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그 대단한 행렬은 동쪽 문 바로 안쪽에 있는 성전에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을 뚫고 동쪽 문을 지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모두가 월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성전에서의 월요일이 지났습니다. 해가 지고 황혼 무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뚫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베다니로 돌아가셨고,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묵으셨습니다.
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를 안고 예루살렘에 돌아오셨습니다. 월요일 밤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보신 광경은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개선장군처럼 동쪽 문으로 들어오셔서 성전을 보니,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에서 강도같은 자들이 참담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눈에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이 광경이 그날 밤 내내 예수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분노하신 채로 예루살렘에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룩한 분노를 안고 다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는 비열하고 사악한 신성모독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동안 어린이들이 “호산나”하고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이 더 격분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는 동안에 어린이들이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종교에 대한 계속되는 모독을 멈추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 자신들의 거짓된 예배를 뒤엎어 버리고 광기 어린 위선을 폭로하면서도 아무런 허락도 구하지 않고 행하는 이 모든 일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화요일에 이렇게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베다니로 가셨다가 수요일에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20장 1절은 수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혹시 맥아더 주석 성경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거기에 ‘화요일’이라고 되어 있을 겁니다. 고치십시오. 안 고치시려면 다시 구입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치십시오. 화요일이 아니고 수요일입니다. 수요일이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성전에 오셨습니다. 성전은 이제 깨끗합니다. 쫓겨났던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증거죠.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고 이제 성전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한 선지자가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성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신 것은 수요일 아침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다시 오셨습니다. 1절입니다. “하루는.” 다른 모든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이 날은 수요일이 확실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성전 안에서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거짓말쟁이들, 날조자들, 조작자들, 거짓 선생들, 위선자들, 사기꾼들, 가짜들은 이제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진리를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사, 하나님의 참된 말씀,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복음을 위한 시간입니다.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위한 시간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성전의 중심이 되셨습니다.
19장 47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백성들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매달려 귀를 기울였습니다.
21장 37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그러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일과였습니다. 수요일, 목요일에는 확실히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금요일에 재판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죠. 그러니까 수요일에 예수님은 거짓만 가득했던 성전에 진리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사탄의 거짓과 속임수밖에 없었던 그곳에 하나님의 순전한 메시지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성전에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성전 안에 있는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날은 정말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20장의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21장에도 더 있긴 하지만, 저는 20장 전체가 예수님이 수요일에 가르치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더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날의 가르침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요일은 정말 중요한 날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는 마지막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요, 긍휼이요, 불쌍히 여기심이요, 애정입니다. 인내이고, 참음이고, 자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영역입니다. 마지막 며칠 중의 한 날인 그 수요일에도, 이스라엘을 회개로 부르시고,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나라에 사회 개혁, 정치 개혁, 군사 개혁을 일으키시는 데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진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성전의 큰 뜰 여기저기를, 여러 장소와 행각과 뜰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가르치셨다고 증거합니다. 성전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동하셨는데, 거기 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항상 뒤쫓았습니다. 19장 47절입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구실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성들을 두려워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랍비들의 방식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걸으면서, 이동하면서 묻고 대답하고 대화를 나누고 논쟁하면서 가르치는 방식이죠. 예수님은 바로 그 방식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사도행전 1장 3절의 내용이었을 겁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정치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제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민의식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가 이루어 주기를 원했던 것들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죄와 그로 인한 비참함, 그리고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종교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셨을 겁니다. 심판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을 텐데,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지옥에 관해서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을 텐데, 자기 힘으로 의에 이르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지를 말씀하셨을 겁니다. 겸손, 영적 파산, 낮아짐, 깨어짐, 그리고 통회하는 심령에 관해서도 틀림없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랑, 그러니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영광스러운 소망인 영생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을 겁니다.
또 예수님은 거짓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어리석음, 겉치레로 행하는 종교적 위선,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보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을 겁니다. 거짓 겸손, 영적 교만,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을 겁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고난인 박해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을 겁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 정직, 용서, 진정한 부요함, 믿음, 은혜, 자비, 이런 모든 것들, 헬라어 동사로 유앙겔리조, 그러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관한 모든 것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 말이죠.
유대 지도자들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붙잡아 가둘 방법만을 찾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19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제 분노가 차오른 나머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20장 1절 하반절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첫 부분입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달려들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여기 이 “가까이 와서”에 해당하는 헬리어 동사 ‘엡히스테미’는 ‘습격하다, 가까이 오다, 곁에 서다’ 이런 뜻입니다.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더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분노를 억눌러가면서 일종의 신학적인 질문을 만들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음속의 적대감을 질문으로 포장해서 감춘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에게 따지고 드는 맹렬한 공격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함께 왔다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대제사장들이란 그 해의 대제사장과 바로 그 아래의 성전 경내 수석을 맡은 대제사장, 그리고 수석제사장들, 전직 대제사장 전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선출된 제사장들인데, 거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권한이 있었죠. 제사장들 간에도 서열이 있었는데, 일년에 2주 동안 성전 봉사 직무를 하는 일반 제사장들을 감독하는 수석제사장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은 다양한 권위자들과 고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을 총체적으로 대제사장들이라고 부른 겁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바리새인이었죠. 서기관들 모두가 바리새인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장로들은 나머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대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이었을 것이고, 장로들은 사두개인과 헤롯당원과 바리새인이 섞여 있었을 겁니다. 이들 모두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의 수는 총 70명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종교적, 영적 문제에 관한 한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예수님께 몰려온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아주 이질적인 부류라는 점입니다. 사두개인에게는 자신들만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도, 헤롯당도, 사두개인도 저마다 견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한 가지에 있어서만큼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던 겁니다.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종교적인 기득권 세력 전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같이 메시아를 죽이려는 열망으로 한통속이 된 겁니다. 유대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들에는 동의하지 못해서 서로 당을 짓고 갈라졌던 자들이, 한 가지 일에서만큼은 앞장서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죽기를 원하는 것이죠. 참 귀한 교훈을 줍니다. 모든 거짓 종교들은 나름대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거짓 종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거짓 종교란 이슬람이든, 불교든, 힌두교든, 기독교에서 파생한 어떤 종류의 이단이든, 그 명칭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종교입니다. 모든 거짓 종교는 복음을 반대하고 대적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언제나 진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한통속이 된 유대 지도자들이 적그리스도가 되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이처럼 하나로 연합할 겁니다. 세계 종교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할 겁니다. 그나저나 이 유대 지도자들은 정말 비겁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속마음과 종교적인 신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가두려고 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을 하나 짧게 붙이겠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거대한 권위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미국 국방부의 위계질서와도 같은 아주 서열화된, 아주 복잡한 권위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절기를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을 책임지는 제사장이 항목별로 따로 있었습니다. 찬양, 나팔, 빵, 소금, 나무, 전제, 제비뽑기, 번제, 물, 표식, 향, 휘장, 예복, 이런 모든 것들을 책임지는 담당자들이 다 따로 정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까지 서열화되어 있었습니다. 위로는 대제사장으로부터 그 다음 바로 아래 서열의 성전 제사장들, 그리고 그 아래 서열의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한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기본적으로 무시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하면서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권위에 대해서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백성들도 이해해줄 것으로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은 겁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어떤 권위를 묻고 있는 걸까요? 가르치시는 것에 대한 권위였을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산헤드린이 임명하지 않으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에 대한 권위였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런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이런 일’에 해당하는 겁니다. 감히 어떻게 이 성전을 당신 마음대로 차지하는가? 이들이 묻고 있는 ‘이런 일’이 의미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메시아로서 입성하신 일, 즉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르는 외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신 그 일입니다. 또 예수님이 성전 안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차지하신 일이 그들이 말하는 ‘이런 일’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저는 지도자들의 질문이 바로 이 일에 대한 권위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처음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을 때도 똑같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당신이 이런 일을 하면서 누구에게서 허가를 받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도 예수님이 허가를 받았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이 허가를 받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는 겁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따라야 할 규칙이 있고 거기에는 권위의 요소가 있다는 것, 즉 권위자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주장하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행한다. 나는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대로 행한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 저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길 바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권위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면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 이렇게 외치면서 예수님께 돌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겁니다. 예수님은 사실 권위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반면에 사족을 좀 달면, 랍비들은 자기 스승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모자를 썼습니다. 이제 막 임명을 받은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랍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모자가 인맥을 보여줬다고나 할까요. 아마 예수님은 모자를 쓰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들은 이토록 권위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대답이 종교 지도자들의 본모습을 폭로합니다. 충돌하던 상황이 반문으로 전환됩니다. 3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이것은 전통적으로 랍비들이 했던 방식입니다. 훌륭한 선생님들은 항상 이렇게 했는데, 질문으로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고전적인 랍비들의 방식입니다. 학생들을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지게 해서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그런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위선의 탈을 벗기려고 하신 겁니다.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그 질문을 던진 것은 구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권위를 주셨다고 대답하게 해서 신성모독으로 고발하고 죽이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하시는 대신,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려고 하십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대한 스승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백성의 지도자여야 하니까요. 영적이고 신학적인 모든 문제에 관해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라고 하신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 번 이렇게 하셨습니다. 5장, 6장, 11장에서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 다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십니다. 4절입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이제 질문의 내용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렇죠? 유대 광야에 살던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사람들이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한 선지자입니다. 누가복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기억하십니까? 천사가 사가랴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불임이고 나이도 아주 많지만 아이를 갖게 될 것이다. 너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장차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로 태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자라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선포합니다.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메시아를 전심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한 것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로 나왔습니다.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요한의 세례는 선지자로서의 사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세례 행위 하나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라는 물음은 요한의 사역 전체를 가리키는 겁니다. 요한의 사역, 즉 회개를 촉구하고 합당한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회개하여 참된 신자가 되었음을 외적으로 드러나게 한 그 사역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이방인들이 개종해서 유대인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자 할 때 거쳐야 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거쳐야만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외친 겁니다. “너희는 유대인이지만 너희 자신을 마치 쫓겨난 이방인처럼 여기고, 너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것을 드러내는 의식을 행해야 한다.” 이 의식이 바로 세례였습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냐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냐? 그런데 이 질문이 유대 지도자들을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람으로부터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으로부터라고는 답하기 더더욱 싫었습니다. 그렇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으로 돌아가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한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각기 다른 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그러니까 백성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이렇게 고백했던 겁니다. “저희는 준비되기 원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길 원합니다. 메시아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러 오실 때 그 나라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7장 30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단코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대답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그야말로 이도 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하신 겁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들로부터냐?” 마가복음 11장 30절에는 동일한 질문이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좀 더 바짝 다그치십니다. 이들은 이제 꼼짝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인정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선지자임을 부인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어떤 결과입니까? 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서로 의논했습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흥미롭게도 ‘심사숙고하다’ 이런 뜻입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1장 25절은 ‘서로 협의하여’라는 의미의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심사숙고하면서 서로 협의했습니다.
뭐라고 의논했을까요?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백성들이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왜 그를 믿지 않습니까?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했는데 왜 믿지 않습니까?” 6절입니다.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할까요? 신성모독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기 17장 4절, 민수기 14장 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던 겁니다. “만일 그 일이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꼼짝없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어야만 하고, 만일 그 일이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백성들이 우리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이니 어찌해야 하는가?”
군중들은 쉽게 흥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일시적인 열광은 군중들이 얼마나 쉽게 흥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결국 뭐라고 했나요? 7절입니다.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했던 지도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진리의 감독관이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셨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여러 번 이렇게 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로 인해서 예수님의 최종 선언이 이어집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저주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질문이 오히려 예수님의 반대질문을 불러오고 결국에는 저주가 선언됩니다. 정말이지 슬픈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야말로 비극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너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는 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와는 다 끝났다.”
백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시면서도, 지도자들에게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이들 모두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신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한쪽을 인정하면 다른 한쪽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든 빛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알려주셔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입니다.
22장 66절을 보겠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로 그 무리가 또 다시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제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심판 뿐입니다. 그들은 또 이렇게 묻습니다.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님은 드디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그들은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그를 죽이라.”
무슨 말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신앙 속에 단단히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23장 8절부터 9절입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헤롯은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말이 없으셨던 겁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이 바로 심판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항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인내하심에도 그 끝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이를 겁니다. “더 이상 너희에게 할 말이 없다.” 이사야 63장 10절입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와 유사한 말씀이 예레미야 11장 7절과 11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누가복음 19장 41절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은 여전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복음을 전하시며, 말씀을 전하십니다. 오순절에는 3천 명이 믿게 될 것이고 그 후에 수천 명이 더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다 끝났습니다. 끝입니다. 부활 때에도,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로 날조했습니다.
오늘 아침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또 유대 지도자들처럼 복음의 문이 영원히 닫힌 분들도 있을 겁니다. 주님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복음을 계속해서 들으면서도 도대체 몇 번이나 더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늘 아침 십자가 앞에 나와 있는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역사 속의 한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친밀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예배를 마치는 이 시간 주님께 나아가면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정말로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는 때로 위선자들에게 아주 큰 은신처가 됩니다. 주님, 위선적인 마음이 모두 드러나게 하시고, 주님께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 모두 종말이 올 것을 두려워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나는 너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심판의 때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옵소서.
언제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듣고 듣고 또 들었는데도 거부하고 거부하고 또 거부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날이 바로 오늘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로 나아갈 때, 한때는 충성스러워 보이던 군중을 선동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끔찍하게 소리치게 만든 유대 지도자들의 그 증오, 그 잔인함 때문에 가장 위대한 은혜가 베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그들의 증오와 살인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구세주에게 행한 그 일을 혐오하는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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