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해서 누가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주간으로 돌아가서 누가가 전해주는 그 위대한 주간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비유의 말씀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오늘 살펴보려는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절입니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는 길고도 비극적인 반역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의 계시에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 불순종하고,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복과 구원과 영생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른 역사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전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가 방금 읽어드린 9절부터 18절의 비유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적 계시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도 불구하고, 이 비유에 묘사된 대로 끝내 아들을 죽이고야 만 그 세대는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틀림없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도, 죄가 없으셨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신 것도 이스라엘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귀신과 질병,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파도와 바람을 잠잠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등 자연을 주관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구원, 영생, 축복을 전하시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러한 사실은 모두 구약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과 지혜를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들이 다 그랬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자들, 구약학자들, 신학자들,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자들, 하나님과 성경을 잘 안다고 여기던 자들, 그들 모두가 왜 예수님을 거부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죄가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보겠지만 그 죄는 가장 추악한 죄의 복합체였습니다.
먼저 잠시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고난주간의 수요일입니다.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수요일인 지금은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몰려든 많은 백성들에 둘러싸여 성전에서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예수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린 메시아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열광했습니다. 개선장군과도 같았던 예수님을 따라서 들어온 이 백성들은, 수요일인 지금까지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눈과 귀를 떼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백성들 속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여러 번 맞섰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듣고 싶어합니다. 그토록 듣기 원했던 것들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가두고 싶어합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린 메시아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수요일인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되실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수년간 증오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빨리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금요일이 되면 마침내 그렇게 될 겁니다. 월요일에 "호산나"를 외치던 바로 그 백성들이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소리칠 겁니다. 180도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이 극적인 반전을 만든 주동자들입니다. 아주 교활합니다.
어떻게 수십만 군중의 여론을 며칠만에 바꿔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같은 사람을 두고 메시아라고 환호하다가, 갑자기 범죄자요 사기꾼이니 죽이라고 외칠 수가 있는 걸까요? 종교 지도자들은 말하자면 사악한 천재들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을 더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지도자들의 적대감을 점점 더 부채질하고 극에 달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과 부딪힐 때마다 이들의 목적과 목표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19절부터 시작되는 본문 말씀을 보면 지도자들은 광적인 절망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이죠. 많은 백성의 관심 속에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뒤흔드는 가르침을 전하시는데, 백성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도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그저 신학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거짓됨을 백성들에게 폭로하신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 선지자들을 죽인 그런 자들입니다. 거짓된 지도자들은 항상 그래 왔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하나님 아들의 처형을 주도할 것입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을 비롯한 여러 분파의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멈춰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지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자신들이 좋아하는 유대 전통을 따라서 예수님을 돌로 쳤을 겁니다. 낭떠러지를 찾아서 예수님을 던져버리고 돌로 무더기를 쌓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가이사가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만에게만 사형 집행 권한이 있었고 유대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180도 돌려 놓을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이들의 사악한 천재성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본문을 분석할 수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죄악의 복합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을 붙여보자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진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종의 영적 병리학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노력에 담긴 죄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19절에 나오는 죄, 증오로 시작합시다. 이 증오야말로 지도자들의 죄의 실체입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즉시 잡고자 하되.” 이들은 할 수만 있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예수님을 체포했을 것입니다. 19절에 의하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그랬습니다. 서기관들이란 율법학자, 율법선생, 신학자들입니다. 대제사장들이란 가장 높은 제사장들입니다.
동일한 사건이 마태복음 22장과 마가복음 12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기록이 서로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루면서 이 다른 기록들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5절에 의하면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현장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들은 증오에 불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거기에 헤롯 당원이라 불리는 자들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당은 또 다른 분파입니다. 헤롯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의 정당입니다. 헤롯 당원들은 참 별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히 헤롯 왕가를 싫어했습니다. 헤롯 왕가는 유대인이 아닌 하스몬 왕조였는데도 이스라엘 땅에서 권력을 쥐고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유대인들에게, 특히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사람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가가 부유하고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헤롯을 지지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었죠. 바리새인들은 기본적으로 헤롯 당원들을 미워했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아주 정치적인 자들이죠. 지배권력에 유착하려고 앞장서서 로마 편을 드는 그런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헤롯 당원들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서로 하나가 됩니다. 사실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이전, 그러니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무렵부터 그랬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 동맹을 맺고 서로 공모해왔던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헤롯 당원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제사장들 중 일부는 사두개인들이었을 겁니다. 사두개인들은 종교적 자유주의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광신도이면서 근본주의자였습니다. 헤롯 당원들은 정치적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서기관이라고 불리는 신학자들과 결탁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겠다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서 말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당시 유대교의 전문가들로 일종의 위원회가 결성된 셈입니다. 마태는 이들이 함께 모여 음모를 꾸몄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고위급 다자 회담입니다. 참석자들이 전부 ‘예수님 제거’라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에 집중해 있는 그런 회담입니다. 모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체포하고 싶어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만약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행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는 꼴이 되어서 백성들의 분노가 자신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주 용의주도하게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 수많은 백성들의 여론을 긍정에서 부정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릴 묘수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오직 로마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예수님을 죽이게 해야 했습니다. 사실 백성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그저 로마가 예수님을 체포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사실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로마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로마의 모든 것을 몹시 증오했습니다. 백성들이 로마를 경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로마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체포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로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당시 로마는 한 가지 죄에 아주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바로 반란죄입니다.
로마인들은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반역자들을 처형하면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기만 하면 로마와 내통하고 있던 헤롯 당원들이 즉시 예수님을 고발할 것이고, 로마는 아주 신속하게 예수님을 반역자로 처형할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헤롯당원들이 모두 하나가 된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을 실행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려고 함께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니까요.
왜일까요? 백성들이 구약에 약속된 대로 메시아가 오시면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보좌를 세우시면,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인들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온 세상을 통치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메시아는 모든 이방인, 이교도, 신성모독자, 우상숭배자들의 압제를 무너뜨릴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사람, 메시아로 인정받을 사람은 누구라도 이방인을 적대하고 로마를 적대해야만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를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게만 한다면 로마는 그 즉시 개입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로마가 메시아가 될 예수님에게 권력을 행사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하지 못하는 것을 보이면, 그 즉시 상황이 반전되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만들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위험한 반역자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로마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많은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죠.
그리고 때마침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거처는 원래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예루살렘에 있지는 않았는데,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이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온 것이죠. 지도자들은 로마가 예수님을 체포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체포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2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이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무력한 분노를 봅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증오합니다. 이들의 증오는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두렵기 때문에 자신들의 안위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로 인해 증오와 함께 두 번째 죄인 교만이 나타납니다. 19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자기들이 바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그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을 두려워합니다.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의 존경과 신뢰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자기들은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높임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의로 가득한 자아를 만족시키는 핵심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특별한 옷을 입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자신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우월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행동을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들이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아버지, 선생님, 주님” 이렇게 불러 주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것처럼 이들에게도 백성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 명예, 지위, 명성, 존경은 모두 백성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들은 예수님의 개선장군같은 입성에 흥분한 채로 예수님이 메시아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6절을 보겠습니다.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무리가, 백성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백성들과 부딪히게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백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은 친히 이들에게는 백성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이용하고 학대했습니다. 백성에게 무거운 짐, 곧 율법이라는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백성들에게 지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것처럼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해서 군림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거짓 교리로 백성들을 더 악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게다가 이들은 백성들을 경멸했습니다. 백성들을 멸시하고 자신들보다 비천하게 여겼으며, 자신들의 집이나 잔치에 초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접촉하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겁주고 학대하는 백성들에게서 받는 칭찬으로, 또 교만으로 영혼을 배불리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에 의해 체포된다면 백성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서 자신들의 명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들은 증오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구실을 찾기 전에는 예수님께 직접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손을 댄다는 말은 직접 예수님을 죽이거나,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도록 예수님을 붙잡아서 넘겨주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백성들 앞에서 뚜렷한 명분도 없이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흥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백성들의 태도를 바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을 세 번째 죄, 곧 위선으로 빠지게 합니다. 이들은 아주 능숙하게 위선의 게임을 합니다. 모든 거짓 종교 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위선자들입니다. 위장의 달인들입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님을 감시한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모든 계획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총독의 직무는 로마 황제 가이사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직접 반역자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처벌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서 반역자로 처벌하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체포하고 처형할 만한 구실이 있어야 했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예수님을 엿보고 감시한 겁니다. 또한 정탐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하고 스스로는 의인인 체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정탐들은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당원은 로마인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과 헤롯당원은 서로 한통속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계획은 예수님의 말을 책잡은 후에 그 즉시 헤롯당원이 가서 로마인에게 고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헤롯당원들은 종교적 문제보다 정치적 문제에 최우선을 둔 자들이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더 잘 믿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죠.
“의인인 체”라는 이 짧은 말에 거짓 종교의 특징이 잘 담겨 있습니다. 거짓 종교는 늘 그렇습니다. 의인인 체, 의로운 체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예수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함정에 빠뜨리고, 체포되어 로마에 넘겨지게 하고, 반역의 우두머리, 반란자로 처형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직접 예수님을 죽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지만, 예수님이 체포되기만 하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이방인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선지자들이 약속한 나라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열방에서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을 가장 높은 나라로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방 권력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진정한 메시아라면 로마인들을 원치 않는 존재, 불경한 존재,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 신성을 모독하는 자, 이교도 침입자, 강탈자로 여길 겁니다. 그런 점에서 메시아는 혁명을 이끄는 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아의 목표는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이방인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우상 숭배를 종식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모두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은 이 모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재림의 때, 종말의 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의 땅을 지배하고 있는 이방인 신성모독자들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동조하실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계속해서 메시아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신다면 말이죠.
물론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죠.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계속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이 로마가 무너져야 한다는 대중적인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적인 말을 하도록 함정에 빠뜨리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면 로마가 예수님을 제압할 힘이 있다고 보일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에게는 로마에 대항할 힘이 없다고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즉시 백성들은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릴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날 것이고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할 겁니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네 번째 죄인 아첨을 저지릅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어떻게 아첨으로 예수님을 함정으로 몰아가는지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여기서 이 ‘선생님’은 가장 높은 랍비에게만 주어지는 호칭입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아주 높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는 건 분명히 고역 중의 고역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증오하면서도 이렇게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자신들이 말한대로 행동하게끔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백성들처럼 그렇게 여기는 척 하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가르침을 전하는 탁월한 선생님으로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탐들의 이 말에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이것은 완전한 아첨입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말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말 자체는 사실입니다. 그렇죠? 전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올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이 모두가 진실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랬습니다. 말씀하시고 가르치기를 ‘바로’, 즉 올바르게 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올도스(orthōs)’ 입니다. 제가 이 단어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올도스(orthōs)’에서 ‘올도피딕(orthopedic)’, 즉 ‘정형외과’라는 단어가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곧은’ 혹은 ‘꼿꼿한’ 이런 의미입니다. 또 ‘올도독스(orthodox)’, 즉 ‘정통’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두 개의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올도스(orthōs)’와 ‘하나님께 올바른 영광을 돌리는 것’을 뜻하는 ‘독솔로지(doxology)’ 혹은 ‘독사(doxa)’가 합쳐진 겁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올도독스(orthodox), 진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아첨한 겁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도 헬라어 표현 그대로 “당신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은 돌아올 반응이나 혹은 말하는 대상에 따라 말을 바꾸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말하지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작 정탐들은 사실로 믿지 않았지만 말이죠.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은 이 말과 일치합니다. 아첨으로 한 말이지만 그 내용 전부는 사실입니다. 정탐들은 “당신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최고의 아첨을 합니다.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다고 합니다. 이 위선적인 혐오자들, 교만한 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첨으로 예수님 비위를 맞추고, 예수님이 자신들이 한 말 그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아첨하며 높여준 대로 하지 않으면 평판과 명성을 잃도록 덫을 놓은 겁니다.
공개적으로 아첨하고 비위를 맞춰서 예수님을 아주 높이 띄워 주면, 예수님도 이 칭찬과 찬사에 반하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란 속셈인 거죠. 그리고 솔직하고 분명한 대답, 하나님께 합당한 똑바른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으로 몰아세우고자 합니다. 그렇게 솔직하고 분명한 대답이란 백성들이 모두 그렇다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백성들이 정말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대답을 해야만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선과 아첨의 죄에 이어지는 죄가 등장합니다. 바로 속임수입니다. 다섯번째 죄입니다. 22절을 보면 질문이 하나 나옵니다. 저는 지도자들이 이 질문을 생각해내기까지 얼마나 걸렸을지 참 궁금합니다. 교활하면서도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20절에서 정탐들은 의인인 체하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23절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다섯번째 죄인 속임수가 등장합니다. 정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반역하는 말을 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반역하는 말을 하면 예수님을 로마에 체포하도록 고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며 로마는 즉시 예수님을 처형할 것입니다. 아주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존경받는 선생에게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경의는 바로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질문, 특히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그런 경우입니다. “옳으니이까?” 로마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일이 옳은 것입니까?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질문하는 이들은 마음 속으로 성경적인 대답은 “옳지 않다”일 거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옳지 않다. 우리는 억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곡식, 기름, 포도주, 토지를 비롯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얻은 소득에 대한 세금을 왜 로마에 바쳐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아무 권리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이방인, 우상숭배자, 정복자인 로마에게 세금을 바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질문하는 자들이 정한 답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예수님이 “옳지 않다”라고 대답한다면 백성들이 “그렇소, 그것은 옳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외치면서 하나같이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싫어한 이유는 그 돈을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을 이교도들, 우상숭배자들, 정복자들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금을 의미하는 단어는 ‘포로스’인데, 이 세금의 종류는 아주 다양했습니다. 토지세가 있습니다. 곡물의 10분의 1입니다. 기름과 포도주의 5분의 1입니다. 모든 항구, 모든 국경, 모든 도시의 성문에서 수입세가 부과됐습니다. 통과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서는 관세가 부과됐습니다.
임금의 1%에 해당하는 소득세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인두세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인두세를 냈습니다. 인두세는 매년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내려고 한 세금이 인두세였습니다. NASB 버전 마태복음에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문장에서 ‘세금’이 ‘인두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켄소스’입니다. 이 단어에서 ‘센서스’라는 인구 조사를 뜻하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아무튼 유대 백성들은 로마인들을 신성모독자이며 우상 숭배자, 불경한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금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아주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하나를 전합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의 일입니다. 갈릴리 출신으로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로마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의 주된 명분은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통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두세를 비롯한 세금을 내지 말자고 저항했습니다. 인두세가 결국에는 이교도와 우상 숭배를 위한 자금을 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물론 로마인들은 반란을 주도한 유다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반란을 따르던 모든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촉발한 이 정서는 30년이 지나도록 유대 백성들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 백성들이 잘 알고 있었던 역사였죠. “유다가 세금 부과에 저항했던 때를 기억하라.”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6년에 시작된 대항쟁도 세금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주후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되었죠. 이 대규모의 반란은 유다의 반란 이후 72년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처럼 세금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진 것은 로마의 점령과 우상 숭배의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일상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이스라엘의 참되고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이와 같은 백성들의 생각대로 대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거죠.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리만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치면서 결과에 개의치 않는 분이라고 치켜세웠으니, 이에 부합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석에 몰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렇게 대답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헤롯당원들이 로마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고발할 것이고, 로마인들이 오면 모여 있는 거대한 군중을 보면서 예수님이 반역을 선동하고 있으며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이라고 판단하고 예수님을 체포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 모든 백성들은 이방인들에게 굴복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결코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이런 함정에 빠뜨린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속임수를 간파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간계’라고 기록되어 있죠. 마태는 이들의 간계를 넘어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동기까지도 언급한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간계를 아셨을까요? 왜냐하면 이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그 사실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24절입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사실 데나리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군중 속의 누군가에게서 찾아내야만 했을 겁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동전이었는데요,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주머니에 작은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에는 우상숭배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리 동전과 히브리 세겔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세겔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죠? 유대인들은 로마 동전인 데나리온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기본적으로 하루치 품삯에 달하는 아주 값진 동전이었는데요, 은이나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략 주전 300년에서 주후 300년 사이의 약 600년 동안, 6세기에 걸쳐서 사용됐습니다. 가이사, 즉 황제가 주조했기 때문에 각기 자기의 형상을 동전에 새겨 넣었죠.
그러므로 데나리온에는 가이사의 계보를 따라서 각 통치 기간에 해당하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동전 한쪽 면에는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문구와 식별 정보가 있었죠.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은 이 동전을 작은 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라고 묻고 계신 겁니다. 모두가 그 대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입니다. 저는 이때쯤에서 정탐들과 질문을 던진 자들, 나머지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손을 비비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말할 것이다. 데나리온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으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공언할 것이다.”
참고로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전 17년에 데나리온을 주조했습니다. 아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런 문구를 새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특히 그 데나리온을 더욱 혐오했습니다. 가이사 디베료는 디베료 자신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이라는 문구를 새겼죠. 지도자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라고 주장을 하셨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이 참 메시아요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면 이 동전이 신성을 모독하고 있고 우상숭배를 하게 만든다고 말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정말이지 아주 교활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25절입니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이 간결한 말씀 안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글쎄요, 세금을 내라는 뜻인가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이지만 훨씬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바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아포도트’로, ‘보상하다, 반환하다, 도로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것들, 곧 세속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는 역사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 하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인들로 하여금 그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이사가 유대인들의 왕이 되었습니다. 가이사가 세상에서의 통치자입니다. 가이사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모든 정부는 로마서 13장이 증거하듯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무고한 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를 처벌하도록 정하신 것이 정부입니다.
로마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평화와 안전을 지키면서 대로와 항로를 만들었고 삶의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대가를 지불할 만한 것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한 것들에 의무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는 미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우리가 낸 세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교량을 정비하고자 한다면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습니다. 이게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 걸까요? 하나님을 높이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정부는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입니다. 우상숭배와 신성모독을 하는 정부,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백성을 압제하며 독재하는 정부, 이교도적인 정부,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려는 정부까지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부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의 정부가 정한 세금은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빚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이 권세가 의회 민주주의이든, 지방정부이든, 경찰이든, 공산주의 독재이든, 혹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제국을 소유했던 황제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빚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정부의 권리를 인정해주신 겁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죠. 정부가 없으면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이 야기되고 질서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만일 정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정부가 금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런 경우에는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순종할지 사람에게 순종할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정부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그 이상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기가 바로 두 가지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할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구약시대의 신정왕국이 끝난 이후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신정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때까지 신성한 사회, 거룩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두 개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 세운 정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가 정부를 전복하려 하거나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전쟁, 시민 불복종, 정치 권력을 이용해서 정부를 통제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미국은 신성한 나라가 아닙니다. 신정 국가도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미국에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왜냐하면 세상에는 미국보다 훨씬 더 악한 정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어떻든지 우리는 좋은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당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은혜롭고 친절하고 자비로운 권면의 메시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렇죠?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정부에 빚진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도 빚진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소유한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법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죠. 우리는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도 빚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가장 위대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데나리온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데나리온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데나리온은 가이사의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런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지도자들은 이제 증오, 교만, 위선, 아첨, 속임수를 넘어 여섯번째 죄인 완악함에 이릅니다. 곧 마치겠습니다. 완악함입니다. 26절입니다.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이들이 회개했다고 적혀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완악합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의 말을 책잡아 붙잡는 것에 실패하자 실망한 채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지도자들은 도망가는 대신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정말 놀랍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이들은 완악함에 빠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 완고함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죄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죄악의 복합체입니다.
23장 2절로 가겠습니다. 1절을 보면 마침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끌려가십니다. 지금 건너뛴 부분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1절입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절입니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아주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아주 뻔뻔스런 거짓말입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예수님이 체포되고 처형당할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만약 예수님이 무언가 책잡힐 말씀을 하지 않으실 경우 그렇게 날조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것이 완악함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거부하려고 애쓸수록 자기 의로 가득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런 증오는 한마디로 치료받지 못할 죄악의 복합체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국 예수님은 체포되고 처형당하실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피를 요구하며 소리칠 것이고, 다시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영적인 영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선택은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거나 지도자들과 함께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맞서는 장면을 통해 소중한 교훈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교훈을 우리의 삶 가운데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적용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완악한 거부자들 편에 서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아직도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주옵소서. 계속해서 거부하면서도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사랑과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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